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빈곳을 말하다/김명희

최한호 2019. 12. 22. 20:13

 빈곳을 말하다

 

김명희 

 

몇 개 뭉툭한 위로와 사무용 슬픔들이 첨부된 후,

이름은 곧바로 삭제되었고

동사무소 직원의 손에서 내게 넘어온 서류는 헐렁하다.

한 사람 몫의 이승이 지워진 서류를 들고서

2월의 거리로 나선다.

음력의 추억들은 겨울바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

쉽사리 높낮이가 변하는 그래프처럼 온통 혼란스럽다.

아버지는 더 이상,

구름을 몰고 다니거나 위급한 근심들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.

주인을 잃은 슬픔들은

기억 한켠에 그늘 한두 개쯤 더 장만하게 될 것이고

나는 지금

습관처럼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

순간,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듯 화들짝 깨어나는 기억

아버지는 없다

밤마다 위급함을 이끌고 중환자실을 통과하던 사연들과

눈물을 빌리러 그의 머리맡을 찾곤 했던 내 오랜 습관들을

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

 

아, 되돌릴 수 없는 먹구름들

오늘 이후 나는,

되돌아올 것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

어떤 후회나 쓸쓸함은 모두 빈곳이 되었다

세상의 뒷면이 된 아버지는 깊은 산 속에 심겨졌고

이승의 휴일엔, 챙겨야 할 방문지가 하나 더 늘었다.

이제 내 안의 금요일쯤엔 폭설이 세상을 잠글 것이고,

빈곳은 한동안 고체처럼 단단해질 것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