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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/박라연

최한호 2017. 8. 26. 18:21

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/박라연

 

나, 

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 

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 

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 

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 

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 

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 

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 

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 

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 

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 

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 

아직은 낯이 설어 

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 

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 

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 

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 

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 

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 

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 

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. 

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 

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 

나… 처음… 사랑할… 때… 처럼… 그렇게…… 

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 

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 

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 

나, 

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