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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 좀 빌립시다/류흔

최한호 2017. 6. 21. 15:09

불 좀 빌립시다

 

 

류흔

 

 

빌려줘서 받지 못하는 건 돈만이 아니다

길을 가다 불시에 빌려주는 것, 불을

빌려줘도 그 불 갚는 사람 못 봤다.

그렇다고 불같이 화낼 수는 없는 일.

아니다,

불같이 화내라고 요일까지 생긴 것이다.

과거에도, 화요일은 있었는데

 

아득하여라.

먼 옛날 옛적에 매머드 고기를 구워먹고 싶거나 빗살무늬토기로 조갯국을 끓이고자 할 때 수중에 라이터가 없거나, 있어도 가스가 닳았을 때

어이, 불 좀 빌립시다!

길 가던 원시인에게 불 빌리자 했다면, 차용증 한 장 없이 냉큼 빌려줄 천사표 원시인 있었을까? 에라, 이 불한당 같은 놈이라고 뺨에서 불이 났겠지.

그래,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.

 

인류 최대의 업적이 불을 만든  것이라면

인류 최고의 고고학적 발굴도 불이었음을

코흘리개도 알고 있다.

불,란서 고고학자 아무개가 수억 년 전 빙하 속에서 냉동된 불을 발견했는데 수억 년을 녹지 않고 버텨온 불 옆에 매머드 뼈와 조개껍데기, 가죽을 벗긴 빗살무늬토끼, 이빨 쑤신 요지, 그리고 놀라워라!

일회용 가스라이터를 발굴한 것이다.

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일회용 라이터와 그 유적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러저러 말이 많고, 누군가 조작했다는 의심도 하지마는

종로통을 걷고 있는 이 순간에도,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.

 

불 좀 빌립시다!

 

지금, 호주머니 속에 세계문화유산 한 개가 있기는 있는 것인데 이걸 빌려줄까 말까

망설이는 중이다.

 

 

「꽃의 배후」

바보새