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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산을 쓰다 / 심재휘

최한호 2017. 9. 7. 10:41

우산을 쓰다

 

 

심재휘

 

어제는 꽃잎이 지고

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

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

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

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

추신한다

좁고 긴 대롱을 따라

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

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선 것인데

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

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

빗소리처럼 오랜만에

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

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

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

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

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

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

우습게도 이미 마음은

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

쓰지 않는다

우산을 쓴다