입추(立秋)지나고
김경호
이제는 안녕
가을비 재촉하는 늦은 퇴근길이여
바람은 더욱 세차게 우리의 목덜미를 흔들고
모여 있어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
그 깊고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
이제 우리는
저 물방울처럼 흩어졌다가
더욱 낮은 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을
문득 낯선 골목을 지나치다가
빈 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
저리 열심히 비 맞고 있는
옹기들을 보면
젖어드는 침묵의 빛남을 만나면
우리의 슬픔도 어느 날
흙으로 빚어 달구어 낸다면
결 고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
이제는 안녕
늘 미결로만 남아있던 나의 퇴근길이여
우리가 떠나 온 빈 방에서는
오늘도 추억의 푸른곰팡이들이
무성하게 어우러지지만
이 밤도 탁상시계의 긴 태엽을 감으며
우린 굳게 잠들어야 하는 것을
춥고 먼 전선에서 어느 날
내가 돌려받은
그대 수취거절의 편지처럼
그렇게 가을은 다시 오는가