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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체국 계단/김충규

최한호 2014. 8. 4. 13:54

우체국 계단 

 

  김충규[1965.11.1~2012.3.18]

 

  우체국 앞의 계단에 

 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 

 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 

 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 

  또 그 곁에는 늙은 

 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 

 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 

 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 

 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 

 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 

  몇 해가 지났다 

 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 

 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 

 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 

 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, 

 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 

 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 

 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 

 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 

 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 

 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 

 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 

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 

 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

 

 시집 『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』(문학동네, 2003) 중에서