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행복/방민호

최한호 2013. 2. 8. 17:19

행복/방민호

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

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

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

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

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 뿌리를 삶았다

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

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

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

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속에 누웠다

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

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

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

상한 간과 후회뿐

그때 우리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

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

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

 

- 시집『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』(실천문학사,2010)